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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독성학

내분비계 교란 물질

내분비계 교란 물질

1. 역사적 배경

임신 중 호르몬 불균형이 태아의 비정상적인 발달을 유발한다는 최초의 보고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39년 미국 노스웨스턴 의과대학 연구팀은 임신한 쥐에게 에스트로겐을 다량 투여하면 암컷과 수컷 모두 생식기 구조에 이상이 생긴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과학계와 의료계는 이러한 현상을 설치류에 국한된 것으로 간주하고 인간에게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일반적으로 태반은 임신한 여성이 화학물질에 노출되더라도 이를 통과하지 못하는 차단막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차단막의 신화는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 사건으로 인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1.1 Thalidomide 비극과 DES의 역설

1957년에 개발된 탈리도마이드는 유럽과 호주에서 진정제 및 구토 억제제로 임신 중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약물을 복용한 임산부들로부터 팔이나 다리가 없거나 미성숙한 신체를 가진 기형아가 다수 출생하였고, 그 즉시 시판이 금지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탈리도마이드 복용 임산부가 기형아를 출산한 것은 아니었으며, 약물의 복용량과 기형 발생 간 명확한 상관관계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기형의 발생은 약물을 복용한 임신 시기에 따라 달랐으며, 주로 장기가 형성되는 임신 5주에서 8주 사이에 복용했을 때 나타났습니다.

Diethylstilbestrol(DES)은 1943년 개발된 최초의 합성 에스트로겐으로, 10여 년 동안 유산 방지제로 임산부에게 널리 처방되었습니다. 그러나 1952년 시카고대학의 역학 조사에서는 DES 복용과 유산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의사들은 1960년대까지 DES를 계속해서 임산부에게 처방했습니다.

1971년 발표된 역학 연구에서는 DES를 복용한 임산부에게서 태어난 여아들이 15세에서 22세 사이에 질암 발생 위험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연구 결과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p값을 보였지만, 일부 학자들은 본 연구의 사례-대조군 방법론에 대한 타당성을 문제 삼기도 했습니다. 이후 다양한 후속 연구들을 통해 여성에서는 T자형 자궁, 남성에서는 이상 고환, 생식기 종양, 낮은 정자 수, 기형 정자 등의 이상이 질암보다 훨씬 더 자주 발생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자궁 내 DES에 노출된 여성들은 일반 여성들보다 동성애 또는 양성애 성향을 보이는 비율이 높다는 결과도 보고되었습니다.


2. 호르몬 불균형

Thalidomide와 DES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환경오염물질에 대한 많은 연구들은 호르몬의 정확한 균형이 태아의 정상적인 발생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에스트로겐과 안드로겐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존재하지만, 그 비율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성호르몬의 비율이 교란될 경우, 신생아의 성발달 이상이나 남녀 성비의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태아가 출생 전 또는 직후에 자연 호르몬이나 유사 호르몬 물질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전반적인 호르몬 균형이 무너져 비정상적인 성기 발달이나 생식기 이상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태아기의 호르몬 균형 중요성은 vom Saal의 실험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실험에서는 자궁 내 수컷 태아 사이에 위치한 암컷 태아에게서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증가했으며, 그 결과 해당 암컷 태아는 수컷에게 끌리는 성적 반응이 결여되고 남성적인 공격 성향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수정란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결정하는 메커니즘은 비교적 최근에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기본적으로 어머니가 제공하는 난자는 X염색체만을 가지고 있으며, 아버지의 정자는 X 또는 Y 염색체 중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X염색체를 가진 정자가 수정에 관여하면 여성, Y염색체를 가진 정자가 관여하면 남성이 됩니다. 하지만 초기 배아는 어느 성으로도 발달하지 않으며, 이 성별 결정은 배아 발생 과정 중에 특정 호르몬 신호에 의해 조절됩니다. 호르몬의 불균형은 성비 이상, 성기 기형, 심지어는 양성동체 발생까지 유발할 수 있습니다. 관련 연구는 대부분 에스트로겐 수용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안드로겐 수용체나 갑상선 호르몬 기능 역시 교란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내분비계 교란물질(endocrine disruptors)은 호르몬 균형을 방해하는 외부 물질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3. 내분비계 교란물질의 특성

현재까지 확인된 내분비계 교란물질은 구조적·기능적으로 매우 다양한 특성을 지닙니다. 이들 화학물질은 모방하거나 방해하는 호르몬과 구조적으로 유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간에도 유사성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는 구조-활성 상관관계가 잘 드러나는 발암물질과는 대조적인 특징입니다.

Colborn 등의 연구에 따르면, 환경에 흔히 존재하는 44종 이상의 화학물질이 내분비계 교란작용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에는 제초제, 살균제, 살충제, 살선충제, 중금속, PCB, 다이옥신, 플라스틱 가소제(예: alkylphenol, bisphenol A) 등이 포함되며, 대개 산업현장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이나 제조 부산물들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난분해성, 고지용성, 높은 증기압 등의 특성으로 인해 대기 중으로 쉽게 이동하고 환경 중에서 오래 지속됩니다.

내분비계 교란물질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직접적인 방식은 자연 호르몬을 모방하거나 수용체에 결합하여 작용을 차단하는 것이며, 간접적인 방식은 성호르몬 전구체인 스테롤 합성을 방해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물질들은 자연 호르몬 농도의 1/100 수준의 미량으로도 작용이 가능합니다. 일부는 체내 대사과정을 거쳐 활성화되어야 하며, 자연 호르몬과 달리 혈장 단백질과 결합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불활성화되지 않습니다. 이는 곧, 유사 호르몬 제재가 자연 호르몬보다 더 강한 작용을 나타낼 수 있는 요인이 됩니다.

또한, 환경 내 내분비계 교란물질의 용량-반응 곡선은 일반적인 S자 곡선이 아니라 '뒤집힌 U자형' 곡선을 보입니다. 즉, 낮은 용량에서도 강한 반응을 유도할 수 있으며, 일정 농도 이상에서는 반응이 줄어드는 비선형성을 가집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반응은 안전기준 설정을 어렵게 만듭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들 물질이 유발하는 손상이 비가역적이며, 노출 후 수년이 지나야 증상이 발현된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손상의 범위는 생식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내·외부 생식기, 뇌, 골격계, 갑상선, 간, 신장, 면역계 등 다양한 장기에 걸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복합적이고 장기적인 영향으로 인해 내분비계 교란물질은 국제적인 건강 이슈로 대두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규제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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